2019년 5월 3일. 이 날은 나의 와인 역사에 아주 중요한 날이다. (너무 별일 없는 역사라, 역사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이날은 바로! 내가 내추럴 와인에 퐁당 빠진날이었다.
유행하는 것에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로선 당연히 안좋아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마셨는데, 왠걸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맛보다 향에 쉽게 매료되는 후각형인간이라 내추럴 와인에서 뿜어져나오는 아로마에 훅 당했고, 라이트한 산미감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첫 와인이 밸런스가 좋고, 처음 내추럴 와인을 마셨을 때 매력을 느끼기 좋았던 와인이라 더 쉽게 넘어올수있었다.
내추럴 와인 덕분에 삶이 좀 더 풍부해졌다. 서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바, 회현역 바 피크닉(Bar Piknic)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좋아하는 친구들과 많은 추억도 가질 수 있었다. 여행 중에도 즐길수 있는 것이 늘어났다. 이전에는 주로 미술관이나 건축물 보는 재미로 다녔었는데, 2019년 프로방스와 꼬뜨 다쥐르 여행부터는 내추럴 와인을 마시는 재미가 더해졌다. 밀라노에서 친구들과 내추럴 와인 바 호핑도 재미있었고. 시카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네, 로건 스퀘어(Logan Square)도 내추럴 와인이 아니었으면 들릴 생각도 안했을 거다. 복덩어리다 ㅎㅎ
내추럴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고도 한동안은 화이트 위주로 마셨다. 원래 그 전에도 레드와인의 탄닌감이 싫어 화이트와인을 주로 마셨기에 내추럴 와인도 반년정도는 주로 화이트 와인만 자연스레 마시게 되었다. 이미 좋아하는게 있으면 다른걸 잘 시도 하지 않는 성격이 반영된 결과였으리라. 그러다 메인이 레드로 바뀌게 된 건, 시카고에서였다. 지금도 내추럴 레드 와인 하면 시카고의 와인샵이 떠오른다. 12월초에 시카고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출장 후에 휴가를 붙였기에 내추럴 와인샵 몇군데를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오는 내추럴 와인은 주로 유럽, 그 중에서는 프랑스가 대다수라 (많지 않지만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내추럴 와인 생산 국가 비율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고), 미국 내추럴 와인을 마셔보고 싶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전철을 타고 western역에 있는 Red & White Wine bar 겸 shop에 갔다. 비가오는 겨울 차가운 공기에 낯선 도시였기에 살짝 움츠렸지만 직원과 와인 이야기를 하며 다시 생기를 찾았고, 나의 취향을 말하고 와인 추천을 받았다. 그때가 12월 초라 그 전주에 보졸레 누보 이벤트가 있었는지 팜플렛이 보여 물어보았는데, 직원이 이 와인이 정말 맛있다며 캘리포니아 누보라며 강력 추천하였다. 마침 브리딩해놓았다고 바로 옆에 있는 바에서 마실수 있다고 알려주어, 글라스 한잔을 마셨는데... 레드 와인에 눈뜸. 탄닌감 없이 베리향이 마구 뿜어져 나오고, 산미도 있고. 레드와인에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는 레드와인을 주로 마시게 되었고 오히려 화이트와인의 매력을 지금은 네거티브 방향으로 가지게 된 상황인데, 이것도 언젠가 변할수 있겠지.
내추럴 와인을 마시면서 내가 바뀐건, 좀 더 열린 취향을 가지고 있어야지라는 마음이다. 나는 무언가가 괜찮으면(괜찮으면이라는 말은... 내가 느끼는 모나지 않음이 크게 없고, 마음에 들고 편한것인데.. 말이 괜찮으면이지 사실 내가 까다로운편인가 생각이 들기도한다) 사람이건 취향이건 내 생각을 잘 안 바꾸는 편인데, 내추럴 와인으로 인해, 취향은 좀 더 열려있어야 삶이 풍성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그 덕분에 이것저것 시도해보려고 노력중이다. (그 덕을 본게 서핑 <:)
요즘은 옆동네 로테르담에 괜찮은 와인샵(Blije Wijnen. 주인아주머니가 수입도 직접하셔서 와인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좋다)이 있어 그곳에서 와인을 공수해 마시고 있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마셨던 와인 중에서는 역시나 대부분 레드와인이 좋았는데, 레드와인이 아닌 딱 하나 겐트에서 사온 Filagnotti가 너무 좋았다. 이렇게 보물을 발견하려면 레드 말고도 이것저것 시도해봐야한다고 생각중인데, 나의 주량과 체력과 와인구매금액쿼터는 언제나 한계가 있어 슬프다. 특히 주량 세 잔... 그 다음부터는 와인이 나를 마신다. 이렇게 와인을 좋아하는데 주량이 적어 친구들이 안타까워한다 흑흑.
나중에 따로 글로 써봐야지 생각은 하지만, 지금 다니는 와인샵에서 제일 좋아하는 와인들은 모두 같은 생산자 와인이다. 한명은 프랑스 남부 랑그독(Languedoc)의 Axel Prufer이고, 다른 한명은 프랑스 루아르(Loire)의 Brendan Tracey이다. 와인샵 주인 아주머니에게 들은바로는 Axel Prufer가 Brendan Tracey의 스타일을 좋아해서(그 반대였나?) 두 생산자 와인의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했다. 두 생산자의 레드와인은 모두 매우매우매우 레드베리향이 올라오고, 드라이하며 산미감이 있다. Vivino를 보면 Brendan Tracey의 레드와인은 대부분 라이트한편인데, Axel Prufer의 레드와인은 Bold한편이라고 해서, 둘다 라이트하다고 느끼던 나는 나는 아직 이 두 차이를 잘 구분 못하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이 차이는 나중에 와인을 잘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
최근에 마신 와인 4병 내리 모두 별로여서, 와인력(와인에 신나있는 시기에 나오는 무언가)이 시들었나 했는데, 오늘 와인샵에서 파는 Axel Prufer의 레드와인 중 아직 마셔보지 않은 유일한 레드 와인을 마셨는데, 코르크향부터 와라는 소리가 나오면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 향을 맡고, 마시자 다시 신났다. 그냥 내 취향이 아닌 와인을 마셔서 기분이 별로였던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와인을 자주 마셔서 이유모를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내추럴 와인 가격도 한국에 비해 많이 저렴한 편인데도 마트에서 파는 와인이 너무 저렴해 내가 사치부리나 고민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향 좋은 와인을 마시면 도로마이타불, 금세 마음이 돌아온다. 나를 위한 위로겸 합리화를 해보자면 ... 맛없는 와인, 내취향이 아닌 와인을 마시기에 나는 소중하다. 인생은 짧고 맛있는 와인이 너어어무 많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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